Gun's blog

페미니즘의 도전

페미니즘의 도전

군사주의와 남성성

<알포인트>와 <평화 만들기>의 정치학은 상반되는데, 이 두 가지 에피소드는 군사주의와 남성성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알포인트라는 영화는 한국을 제국주의의 희생자로서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베트남에 대한 가해자와 미국에 의한 희생자라는 이중 정체성의 해석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중요한 점이 한가지 있는데, 피아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적'이란 인식 주체인 ‘나'의 투사일 뿐, 실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극 중 병사들은 적을 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너를 쏘는데 그러나 내가 본 너는 곧 나 자신이다. 결국 나를 바라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곧 나를 죽이는 것이 된다. 이를 꼭 기억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보자.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는 국방, 교육, 근로, 납세이다. 그렇다면 국방의 의무를 지지 못하는(배제된) 사람은?

근대 이후 여성은 공사 분리 제도를 통해 남성과는 다른 형태로 국가, 사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남성들의 세계인 공적인 영역은 남성만을 주체로 세우기 때문에 여성이 공적 영역과 관계를 맺으려면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 남성을 매개할 때만 가능하다.(중년 기혼 여성의 페미니즘 사례) 때문에 남자가 없는 여자들 - 레즈비언, 비혼 여성, 이혼 여성 - 등은 한국 사회에서 시민권을 갖기 어렵다.

위의 말처럼 여성은 국방의 의무를 질 수 없기 때문에(징병에 한해) 병역의 의무가 있는 남성에게 밥을 해주거나 섹스 상대가 됨으로써 국가의 인정에 의해 국민이 된다. 이는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성에 대한 격렬한 비난과 관련이 있다. 이와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군 가산제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처벌하는 격이다. 즉 여성과 장애인은 ‘특권층'이어서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2등 시민'이므로 군 가산제라는 권리도, 병역이라는 의무도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여성은 병역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군 가산제를 주장하는 남성들에게 군 경력은 ‘희생'인 동시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정상성과 자부심의 원천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군 가산제 논란은 ‘이회창 가'와 같이 군대를 가지 않는 남성과 군대에 가야하는 남성 간의 갈등이 군대를 가는 남성과 ‘군대도 못 가는' 여성들 간의 갈등으로 이동한 것이다. 군대를 안 가도 되는 남성에 대해서는 분노와 적대감을 가져도 그것을 공식적인 저항으로 표출하지는 않으며 여성, 장애인, ‘방위' 등에 대해서는 남성성의 미달의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와 조롱을 일삼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결국 병역을 어쩔 수 없지 져야하는 피지배세력일 뿐인 군대에 가는 남자의 비난의 화살이 지배세력으로 향하지 않고 가지 못하는 또 하나의 피지배세력에게 향하는 모습이? 마치 위의 알포인트에서 적을 향해 쏘는 듯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쏘는 듯한 형상이 그대로 비춰진다.

평화운동에서도 남성성은 그대로 드러난다. 252p 중간문단에서는 촛불 시위 현장에서의 문제를 253p에서는 <평화 만들기> 라는 잡지에서 평화운동가의 여성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를 낱낱이 볼 수 있다. 같이 읽어보자.

더 큰 문제는 <평화 만들기>뿐 아니라 한국 남성들의 일반 의식을 대표한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일반적으로 피해 여성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성폭력으로 인해(정확히 말하면, 성폭력이 발각됨으로 인해) 남성의 명예를 훼손시켰기 때문에, 남성 일반과 자기 자신에게 죄의식을 느낀다고 보고하고 있다.(정준영, 최종훈 몰래카메라 영상 유포 재판 때 유죄 판결받고 울었던 장면이 생각난다. 이렇다고 생각하니까 빡친다. n번방도 마찬가지 일 것 같아 더 빡친다.)

군대 내 성폭력, 여성 고문 방식, 기념탑의 남근 형태, 출전 직전 포르노 등등 많은 예시를 통해 군사주의, 전쟁과 남성성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고리이다. 이런 남성적 언어로 전쟁, 군대를 명예로운 것으로 만듦과 동시에 그 이외의 사람들을 배제한다. 군사주의는 성차별을 발판으로 한 남성들의 계급을 초월한 남성 연대로만 작동 가능하다. 군 제도에 동원되는 피지배 계급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성찰하여 지배 계급 남성과 분리를 알아차리고 여성과 연대할 때, 군사주의에 대한 사회적 문제 제기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남성성, 폭력의 시장화

‘묻지마 폭력'은 이유 없는 폭력이 아니다. 폭력의 개념을 ‘타인의 의지에 반한 일방의 행위'라 할 때 이유 없는 폭력은 모순이다. 가해자가 생각하는 피해자의 잘못은 언제나 자의적이다. 이 때 잘못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위계)에 의해 구성되고 판단된다. 즉 이유가 있어서 묻지마 폭력이 일어나는게 아니라 위계가 있기 때문에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국가가 군대를 소유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적자가 되는 시대가 오고 결국 폭력산업이 민영화된 시대까지 오게되었다. 같은 형식으로 이제는 국가의 형태는 흐릿해지고 대도시들의 연합이 되어가고 있다. 대도시들만의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이 커뮤니티에서 제외된 도시들은 낙후된다. (서울과 도쿄의 차이보다 서울과 울릉도의 차이가 더 크다.) 국가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주체에서 배제된 데 이어, 아예 생존의 영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개인에서 타자로 다시 잉여로 축소된 것이다. 국가가 없는 국민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주체인 이동하는 유목민이 아니라 어디에도 존재가 등록되지 않은 기민, 즉 잉여다.

묻지마 폭력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폭력의 이유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다. 이 투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타자화된다. 268p를 읽어보자.

자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저런식으로 바라보면서 공포에 떨고 있다.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채. 다시 한 번 알포인트를 소개하던 어구가 생각난다. 내가 본 너를 쏘는데 그것이 너가 아니고 나 자신이다. 결국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피지배세력인 소수자(사실 이제는 다수)에 대해 타자화를 멈추고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오지 않았을까? 이제는 국민, 시민, 비장애인, 정상인의 자격을 물을 때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개인(나)와 연대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은 아닐까?

ⓒ 2019. gun all rights reserved